세계7대 불가사의, 아틀란티스, 이집트의 파라오,에 관한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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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란? 아직까지도 그 진위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신비한 대륙으로, 포세이돈의 장남인 아틀라스(아틀란트)가 이 땅을 최초로 다스리게 되어 '아틀란티스'라 명명되었다. 아틀란티스는 어떻게 보면 신화상에서만 존재하는 대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유는 아틀란티스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틀란티스에 대한 관심은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최초로 언급한 이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이 신비한 대륙에 대한 연구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욱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유럽인들의 문명의 뿌리 찾기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계의 패권을 잡은 이후 유럽인들의 관심은 그들의 뿌리인 자신들의 문명을 과시하는데 집중되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역으로 그들의 뿌리 찾기를 연구하게 되고, 그들의 신화도 이러한 뿌리 찾기에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신화상의 이야기로만 믿었던 트로이와 미케네 등의 존재가 유적의 발굴을 통해 역사적인 사실로 바뀌면서 이러한 관심은 더더욱 고조 되었고, 아틀란티스도 이와 같은 영향으로 관심이 점점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유럽인들은 아틀란티스를 모든 문명의 근원이라 생각했기에 더더욱 아틀란티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 아틀란티스를 최초로 언급한 문헌 아틀란티스의 존재와 멸망에 관해서 최초로 언급을 한 사람은 아마도 플라톤 일것이다. 일부 학자 들은 플라톤이 한 아틀란티스 존재설은 교육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 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의 저 서 "티마이어스","크리키어스" 에 보면 교육적 목적으로까지 그렇게 자세하게 지어 낼 필요가 있겠냐? 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는 아틀란티스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존재 가능성이 높다.) 일찍이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랄타 해협) 서쪽에 하나의 섬이 있었는데 이 섬은 리비아(북아프리카)와 아시아(소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그 섬에서는 다른 섬으로 건너 갈 수가 있었고 그 섬들을 통해 대서양을 에워싸는 반대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
"이 섬은 아틀란티스라고 불리웠는데 이 섬은 주변의 섬들과 리비아, 이집트, 유럽의 티레니아 근처까지 복속시킨 강대한 제국의 중심이었다. 이 국가는 헤라클레스 기둥의 안쪽 여러 국가 전부를 복종시키려 하였다. "
"아테네 군대는 그리스 연합군의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워 침략군을 격퇴시켰다... 그후 격력한 지진과 홍수가 일어나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아테네 사람들은 땅속으로 가라 앉았고 마찬가지로 아틀란티스 섬은 바다 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방면의 바다쪽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대량의 뻘이 차서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그 섬의 침하 때문이었다. "
" 이 나라 시조 포세이돈의 장자 아틀라스가 초대의 왕이 된 데서부터 섬 전체와 주변의 바다에도 아틀란티스란 이름이 붙었다. 전성기의 수도는 바다와 이어지는 최대폭 533 미터의 3중의 환상 운하로 둘러쳐져 있었다. 아틀란티스에는 백, 흑, 적의 돌이 있었으며 이 세 가지 돌을 사용한 얼룩색을 띤 건조물이 있었다. 왕궁은 중앙 섬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었다. 여기에는 포세이돈과 애인 크레이트를 모신 신전이 황금의 벽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이와 같은 건조물은 금, 은, 구리, 동, 상아 등 불꽃처럼 빛나는 이상한 금속 등으로 호화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운하의 환상로에는 공원, 학교, 병사, 경마장 등이 있으며 이곳엔 또한 탑과 문이 달린 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큰 부두는 각지에서 모이는 상인들로 밤낮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에 관한 실재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그는 이러한 것들을 단지 교육적 용도로 지어냈을까?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9천년 전에 아주 강력한 고대국가가 있었다. 이 나라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이상국가였다. 큰 규모의 지진과 해일이 일어나, 하룻밤 사이에 아틀란티스는 바다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아직 사라진 섬과 유적들이 수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배가 향해하기가 불가능하다."
그 후로 플라톤이 언급한 아틀란티스설에 대한 진위 여부를 놓고 다양한 주장들이 있어왔다.
학문적 과도기에는 어느 대륙이 아틀란티스냐를 놓고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대서양이나 지중해설이 유력했으나 자신들의 나라가 아틀란티스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도 많았고 실예로 영국은 자신들의 나라가 아틀란티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가장 합당한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도넬리라는 학자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지금의 대서양 한 가운데라고 주장하였고 근거로 이집트 문명과 마야에 이르는 동서로 이어진 문화전파루트로서 아틀란티스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동서의 문명이 다르게 발전을 하였지만 두 문명은 아틀란티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대홍수로 가라 앉은 문명이 대륙으로 전파되어 동서문화가 제각기 발전했다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역사 </A> 존재 연대 : 기원전 2만 5천 5백년 ∼ 기원전 1만 1천 6백년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추정을 한 문헌상의 연대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현인 솔론이 한 이야기라며, 솔론이 기원전 6백년 경에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9 천년 전에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라앉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기원 후를 2천년이라 하여 계산을 하면 아래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6백년(솔론의 이집트 방문) + 9천년(이집트에서 말한 아틀란티스 침몰) + 2천년(기원후) = 1만 1천 6백년(아틀란티스 멸망 연대) 그리고 아틀란티스는 가라앉기 전 1만 3천 9백년 동안 왕가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연결을 하면 아틀란티스의 존재 연대가 기원전 2만 5천 5 백년에서 기원전 1만 1천 6백년 경임을 추정할 수 있다. 모든 역사의 시작이 신화를 바탕으로 하듯이 아틀란티스의 역사도 신화에서 시작을 한다 . 옛적에 신들은 모든 토지를 구분하여 자기들끼리 분배를 하게 되었다. 이때에 바다와 지진을 관장하는 포세이돈은 아틀란티스를 다스리도록 하사를 받게 되었다. 포세이돈은 그곳에서 클레이토라는 인간의 아내를 얻고 이 사이에서 다섯 쌍의 남자 쌍둥이를 낳았다. 이 중에서 장남인 아틀라스가 왕이 되어 이 땅을 다스리게 되었고, 그의 이름을 본따서 이 땅을 '아틀란티스'라 명명하였다. 아틀란티스는 풍족한 자원과 뛰어난 문명을 바탕으로 매우 번성한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포세이돈을 숭상하며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던 아틀란티스도 결국은 부패의 길을 걷게 된다. 백성들은 부와 게으름 그리고 사치의 신인 거짓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아틀란티스인 들은 세계 정복을 위한 전쟁에 나서 다른 섬들에 거대한 함대들을 보내 지중해 연안 정착지들의 주민을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이 정복 전쟁이 '아테네 원정 실패'란 결과를 가져와, 이를 계기로 아틀란티스는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 결국 거대한 화산 폭발로 인하여, 많은 부귀와 영화, 그리고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던 아틀란티스 대륙은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아틀란티스의 문명 1. 자연 환경 리비아와 소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큰 거대한 화산섬이다. 이 섬은 매우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장대한 산맥이 존재하고, 온갖 동물들이 번성하는 푸른 벌판, 곳곳에 위치한 천연 온천, 그리고 1년에 2회의 수확을 약속하는 비옥한 토지가 존재했다. 또한 온갖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특히 고대인들이 매우 귀중하게 여긴 전설적인 보석 무지개 빛 '오리하르콘'이 많았다. 2. 인문 환경 1). 정치
열 명의 왕들이 각기 자신이 소유한 도시에 이웃한 영지에서 주민과 법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아틀란티스의 법률 제도는 포세이돈이 물려준 것으로, 이 법률제도 밑에서 주민들은 평화롭게 살았고, 또한 이 법률은 매우 공정하여 만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아틀란티스의 왕들의 상호관계 및 지배자로서의 교제는 포세이돈의 신명에 위해서 결정되었다. 2). 경제
아틀란티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운하와 항구, 풍부한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한 해상 무역이 번성하였다. 특히 '오리하르콘'의 수출로 인하여 많은 부를 쌓게 되었다. 또한 연 2회의 수확을 보장하는 비옥한 토지와 생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갖춘 자급 자족적인 경제 상태였기에 수입에 비해 수출이 훨씬 많게 되어 많은 부를 축적하여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3). 군사
아틀란티스는 전차 1만대, 이두 마차 3만대, 기병, 중무장병, 사궁병, 투창 ,병등의 대군단과 더불어 1천 2백척의 군선을 바탕으로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해군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마리로 세계 최강의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아틀란티스가 지중해의 국가들을 단 시간에 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세계 최강의 대군단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4). 신앙
아틀란티스 인들의 신앙의 주체는 그들의 문명의 시조인 바다의 신이며 지진의 신인 포세이돈이었다. 아틀란티스 인들은 도시의 중심에 거대하고 화려한 신전을 건축하여 그들의 신앙의 주체인 포세이돈을 숭배했다. 5). 건축술
아틀란티스인 들은 특히 건축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특히 도시의 설계를 들 수가 있다. 섬 한가운데에 건설된 아틀란티스의 수도는 그 규모와 함께 흑색, 백색, 적색의 돌들을 섞어 건축학적으로 조화 있게 설계한 장엄한 공공 건물들이 돋보였다. 또한 이 도시는 완전한 동심원을 이룬 5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에 있는 여러 항만들은 거대한 환상 운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규모와 함께 조형미를 살리는 뛰어난 건축술을 지니고 있었다. 멸망원원에 대하여 아틀란티스를 소멸시킨 지구최대의 재앙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헤르비거의 <얼음의 우주> 지구의 달처럼 우주의 행성은 그 보다 작은 행성이 돌면서 그 곁을 통과할 때 포획한다 . 세월이 흘러 그것이 본체와 하나가 되고 , 수천 킬로미터까지 접근하면 인력으로 부수어버린다. 지구에 위성이 접근하면 인력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력작용으로 적도 지방의 해수가 위로 끌려올라가서 적도 지방은 수몰되고 , 양극 지방의 물은 말라버린다 . 위성의 파편이 지구 위에 떨어지면 그 여파로 바닷물이 극지방으로 밀려가 극은 수몰된다 . 기원전 1만년경, 달이 지구에 접근함에 따라 지구표면에 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재앙의 신화나 전설로 내려오고 있으며 , 아틀란티스도 그 중 하나이다. 카넬 브라인의 <아틀란티스의 그림자> 이 사람도 헤르비거의 달의 이론을 따른다 . 그리스 신화엔 달이 없던 시대가 등장하고 있으며, 남아프리카 부시맨의 전승에는 하늘에 두개의 달이 뜰때 재앙이 일어난다고 했다 . 중국의 전설에도 천체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유성의 낙하를 암시하는것 같으며 이와 유사한 전설이 세계각지에 있다 . [벨리코프스키]의 <충돌하는 우주> 기원전 15세기경, 목성에서 태어난 혜성이 지구를 스쳐갔고, 이때의 대이변이 <출애급기>의 홍해가 갈라지 는 이야기이다 . 그로부터 52년후 같은 혜성이 접근, <욥기>의 태양이 공중에서 정지한 이야기, 바다가 솟아 오른 이야기 등이다 . 그후 기원전 8세기경 이 혜성의 영향으로 궤도가 변해버린 화성이 갑자기 지구에 접근했으며, 혜성은 지구와 수성사이에 궤도를 정해 금성이 되었다 . 혜성이 지구를 지나가면서 불타는 운석이 지표면에 떨어지고 , 자전 속도의 변화로 지각이 갈라져 육지가 융기 , 함몰한다. 인력작용으로 해수는 몇 킬로미터 높이로 솟았다가 대륙을 덮친다. 영국의 챌린저 1세호가 1872~1876년에 걸쳐 대서양 바닥에 큰 산맥이 있음을 밝혀냈고, 그후에 이 대양의 중앙부 해저에 높은 봉우리 , 계곡, 절벽 등이 있음을 밝혀냈고, 용암으로 보이는 암석파편을 발견. 이는 타킬라이트라고 하는데 공기 중의 가벼운 압력에서만 형성가능해 통상기압으로 냉각고체화된 후 해저로 가라앉은 것이다 . 아틀란티스의 위치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에 대한 언급을 한 이후, 아틀란티스가 존재했었던 위치는 아직까지도 많은 학자들에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어느 것도 확실한 위치를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하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심증은 가는데 물증인 아틀란티스의 유구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이제껏 주장되어진 많은 학설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학설에 대한 고찰을 하겠다. 1. 대서양설 19세기 말 정치가이면서 학자인 이그나티스 도넬리는 50줄의 나이에 <노아 홍수 이전의 아틀란티스 대륙>(1882)과 <신들의 황혼, 불과 돌의 시대>(1883)를 출간했는데 이 책들은 1963년까지 50회 이상 재판(再版)됐다.
그는 아틀란티스가 '심한 지진과 홍수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없어졌다'라는 플라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세계에 퍼져있는 홍수전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다. 그는 아틀란티스 대륙이 기원전 9800년(플라톤이 말한 연대)보다 이전에 대서양 한가운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매우 진보된 금속 문명, 문자의 발명, 나침반의 발견, 항해술의 발전, 화약, 종이 등 모든 분야가 거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각 대륙에 퍼져있는 피라미드, 미라의 보존기술, 태양력, 그리고 대홍수의 전설 등을 예시 했다. 즉 아트란티스 대륙이 대홍수로 가라앉은 후 두 문화권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제각기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넬리의 가설은 해저의 팽창이나 대륙이동설, 혹은 다른 분야의 과학의 진보에 의해서 대부분 부정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두 대륙이 하나(아틀란티스)에서 출발했다면 고대 문명에서 사용되었던 바퀴와 가축들이 왜 신대륙에는 사용되지 않았냐는 것이다. 2. 지중해 연안설 문헌상 연대 추정의 문제점 1. 고고 인류학적으로 볼 때 기원전 2만년 전부터 1만년 전 사이에는 막 초기 인류가 등장한 때이다. 근데 이 시기에 아틀란티스처럼 고도의 도시 문명이 존재했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2. 인류의 최초의 도시 문명인 여리고, 터키, 소아시아 등이 등장하는 시기가 아틀란티스의 존재 연대보다 거의 2배 이상 늦은 기원전 6천년 경이다. 3. 대화편의 내용 중에 전차의 존재가 언급된다. 이는 철기와 청동기를 사용했다는 것인데 유럽의 철기 사용 시기와 비교해서 볼 때 시기가 너무 이르다. : [대화편]에 나오는 대화는 많은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다. 섬의 크기라든지 운하의 크기는 당시의 기술적인 문제에 비추여서 생각하면 커다란 어려움 이 있다. 아틀란티스의 존재 연대 또한 이러한 수치상의 문제가 발생하고있다.플라톤이 그의 이상주의적인 국가관에 의해 수치를 부풀린 듯한 인상을 갖게도 한다. 이러한 수치상의문제를 해결하려면 모든 수치를 10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아틀란티스의 문헌상의 연대를 10으로 나눈다면, 아틀란티스는 기원전 2천 8백 9십년 경에서 1천 5백년 경에 존재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아틀란티스가 존재했었다면, 그 동안에 드러난 아틀란티스의 연대 추정상의 수치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 아틀란티스의 존재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올 수 있게 된다. 또한 앞으로 언급될 아틀란티스의 존재 위치를 기원전 1천 5백년 경의 테라섬의 화산 폭발 시기와 일치시켜 설명할 수도 있게 된다. '에게해의 폼페이'리고 알려진 화산재에 묻힌 갈리스테 섬의 고대 도시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의 일이었다. 지금은 '산토리니' 또는 '테라'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적지는 키클라데스 제도의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데, 전에 화산이 서있던 중심부에는 팔레아카메니("옛 불탄 섬")와 네아카메니("새 불탄 섬")라 하는 두 개의 용암 덩어리가 있다. 이 용암들은 대폭발이 있고 한참 후에 생긴 것인데도 이따금씩 몇 가닥의 연기가 솟아오르곤 하여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화산의 마지막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구덩이가 파지고, 그을리고, 들쑥날쑥하고, 험악한 이곳 풍경은 마치 달 표면을 연상케 한다. 산토리니와 테라시아 및 아프로니시섬 등은 한때 비옥했던 아틀란티스의 땅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언급할 시의 세계관은 지중해를 중심으로한 지중해 중심적인 사고관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세계는 지중해와 지중해 일대가 전부였다 . 이를 바탕으로 추론을 해 보았을 때, 당시의 세계관으로는 대서양이나 아메리카를 언급하기에는 너무 시기가 이른 감이 있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의 크기에 대해서 거론을 할 때 리비아와 소아시아를 합친 것보다 크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당시의 세계관에 비추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추론해 보면 아틀란티스가 리비아와 소아시아 사이에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제 아틀란티스의 비밀이 밝혀진 듯 하였으나 1977년 필힐러와 시링크라는 두 독일 과학자는 화산의 분출물을 세심하게 조사하여 산토리 섬의 폭발은 크레타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은 화산이 폭발한 후 거의 100년이 지난 기원전 1380년까지도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웠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존재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기록된 9,000년 전이라는 것이다. 먼저 플라톤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 9000년 전이라고 했는데, 산토리니 화산 폭발은 1600 ~ 1500년에 있었다는 점이다.
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 있었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위치가 너무 틀린 것이 아닐까?
아그네티어스 도넬리의 학설 </A> 도넬리는 정치가이자 미국하원의원이었고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학식이 풍부하며 저서로는 `아틀란티스; 대홍수 이전의 세계' 가 있다. +++이그네이셔스 도널리의 <아틀란티스, 대홍수 이전의 세계>가 제시한 13가지 명제+++ 1. 오랜 옛날, 지중해 저편 대서양에 큰 섬이 하나 있었으며, 고대인들은 그를 아틀란티스라 하였다. 2. 플라톤이 묘사한 이 섬은 오랫동안 한편의 우화로 취급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3. 미개 상태의 인류가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곳은 아틀란티스다. 4. 아틀란티스가 많은 인구를 거느린 강국이 되고 그 인구가 퍼져 멕시코만, 미시시피강, 아마존강, 남미태평양, 지중해, 유럽, 아프리카의 서안, 발트해, 흑해, 카스피 해 등의 주변의 문명국가가 건설되었다. 5. 이것이 바로 대홍수 이전의 세계로 에덴동산, 엘리시온의 들판, 알키누스의 나라, 메솜팔로스, 올림푸스, 아스가르드.....이런 전설상의 낙원은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왔던 아틀란티스에 대한 기억이다. 6. 고대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인도인 등이 숭배하던 신들은 아틀란티스의 왕이나 영웅들의 이름이었다. 7. 이집트나 마야의 태양숭배 신화는 아틀란티스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8. 아틀란티스인에 의해 건설된 가장 오래된 식민지는 이집트일 것이다. 9. 유럽의 청동기 시대 기물은 아틀란티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틀란티스는 최초의 철기 제조자이다. 10. 유럽알파벳의 기원인 페니키아 문자는 아틀란티스에서 유래한다. 마야문자까지도. 11. 아리아계, 즉 인도유럽어족, 셈어족, 투란계의 발상지 또한 아틀란티스다. 12. 아틀란티스는 자연의 변동에 의해 파멸되었다. 13. 극히 일부만이 배나 뗏목으로 피해, 이 재앙을 알렸다. 이것이 대홍수, 대범람의 전설로 남은 것이다.
그의 주장에는 아틀란티스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 증거는 없다. 고고학, 해양학, 언어, 지리, 역사, 신화, 인종, 생물학에 이르는 연관성 없는 학문들을 종합해 아틀란티스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철저하게 플라톤의 학설을 기반으로 그의 학설을 확장시켰다.
"선사시대 대서양에 고도의 문명을 가진 강대국이 존재했다. 제국의 중심부는 지브롤터 해협의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섬으로 으로 이루어져있고 그보다 작은 섬들과 무인도가 마치 징검 다리 돌처럼 배열되있어 지리적으로 구대륙과 신대륙이 연결되있다. 서쪽으로 페루, 동쪽으로는 이집트, 지중해, 북쪽으로는 아일랜드로 이어지고 인도 중국과도 경제접촉이 있었다.
3개의 인종이 살았다. 적갈색 피부를 가진 (오늘날 중앙아메리카 인디안, 베르베드족, 이집트인이 여기에 속한다 )인종이 최상위 계층을 이루었고 황색인종이 중간 계층, 백색인종 (그리스계)이 하위계층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그의 주장중 가장 눈에 띄는 학설이 있다. 바로 `확산이론'이다. 확산이론이란 지리적으로 현격한 곳에 있으면서도 서로 비슷한 문화가 생성되었다면 별개로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고 상호접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근거로 멕시코의 유탄강이나 이집트, 중동지역의 사원과 피라밋의 유사성을 예로 들었다.
성서에서의 에덴동산, 호머의 극락정토, 고대 북유럽 신화에 아스카르드( 신들의 세계) 가 아틀란티스라고 주장했다. 멸망의 원인으론 지진, 화산폭발, 홍수등의 재난의 복합성을 들었다. 도넬리의 학설에 대한 현대적 평가
최초의 저명한 아틀란티스학자는 미국의 정치가이며 국회의원인 도넬리였다. 1882년에 도넬리가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아틀란티스 대홍수 이전의 세계는 아틀란티스학의 바이블이 되어었다.
도넬리의 논제는 그가 관찰한, 콜롬부스 이전의 아메리카 문명과 고대 이집트문화 사이의 몇 가지 유사성 에 입각하고 있다. 그중에서 그는 피라미드의 건설, 미이라 본존 기술,1년이 365일로 된 역법의 발달, 그리고 대홍수의 전설등을 예시했다. 그는 이 두 문명이 공통의 기원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즉 두문명이 모두 대홍수 이전에 신세계와 구세계의 중간에 즉 두 문명이 모두 대홍수 이전이 신세계와 구세계의 중간에 있던 한 대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그 대륙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후 두 문화군이 동쪽과 서쪽에서 제각기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도넬리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여러 가지 이론을 갖추고 있었다. 아틀란티스학은 여러가지 신비로운 수수께끼를 풀어줄 해답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컨대, 유럽에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한 끝에 사르가소해세 산란하는 뱀장어들의 번식습관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강들에서 지낸 과거의 경험 때문이라고 설명되었다.
아틀란티스는 다른 유럽인들과 인종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전연 다른 바스크족의 원 고향이라고 설 명되었고, 또한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종종 발견되는 백인 인디언의 원 고향도 아틀란티스였다고 설명되었다. 그렇다면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전멸된 카나리아제도의 동굴거주 원주민 구안치족이야말로 아틀란티스인들의 후손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피부가 하얗고 턱수염을 기른 신으로서 마야족이 쿠쿨란이라 부르는 고통테크 족은 케트살코아틀, 그리고 잉카족은 바라코차라고 불렀던 신이야말로 아틀란티스말고 어디서 왔겠는가?
현대과학, 특히 지난 30년 동안 장족의 발전을 이룩한 해양지질학에 비추어 보면 도넬리의 이론이 어떠한가? 도넬리가 제시한 여러가지 유추에는 문제점이 많아서 그 당시에 맹렬한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의 학설이 오류투성이임이 분명히 밝혀졌다. 그는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수수께끼와 신비를 어떤 형태로든 아틀란티스와 결부시켜려고 시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도넬리가 모든 이론의 바탕으로 삼은 기본 가정- 즉 아틀란티스가 대서양에 존재했다는 가정- 은 이제 완전히 오류임이 증명되었다. 대륙형성 및 해저에 관한 해양학의 연구 결과가 면적이 9200만 킬로미터나 되는 대서양 어느 곳에도 아틀란티스 규모의 지각변동이 발생했다거나 또는 그러한 대륙이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조레스 제도에서 시작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2만 킬로미터를 뻗어내려간 거대한 해저산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산맥이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면 침강중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산맥은 비록 화산산맥이기는 하지만 바다 표면을 향해 "융기중"에 있다.<아틀란티스 정보 끝> 세게 미스터리 유물들 <출처는 위의 출처와 동일> 아칸바로의 공룡 토우(멕시코, 기원전 2500년)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북서방향 18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소도시 아칸바로가 있다.1945년 7월, 아마츄어 고고학자며 독일인 실업가인 바르데마르.유루스루트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부루마운틴 산자락에서 막대한 양의 공룡토우를 발굴해냈다.(3만점 이상) 토우는 장식품, 항아리, 그릇, 피리, 무기, 공구 등 고대인의 생활용품과 함께 발굴되었다. 1968년, 해프굿박사가 토우 파편 샘플 3종류를 방사성탄소C14에 의해 연대측정한 결과, 기원전 1640년, 4530년, 1110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그 당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새롭게 개발된 TL측정법으로도 같은 샘플의 연대를 측정해보았다. 방사성탄소C14법은 샘플내의 유기물을 측정하지만, 이 TL측정법은 유기물내의 열에너지양을 측정하는 것으로서 정확도가 더 높다. 측정 결과, 3개의 샘플 모두 제작연대가 기원전 2500년(오차5-10%)이라고 나왔다. 진화론자들에 의해 이 토우들이 조작품이라는 반론이 나왔지만, 다양하고 사실적인 토우들을 직접 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는 못한다. 이 토우들은, 화석을 보고 복원해낸 티라노사우르스, 프레시오사우르스, 스테고사우르스, 프테라노돈과 그 모양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혹자는 고대인들도 화석을 보고 상상해서 그런 토우들을 만든 것이 아닐까 억측을 해보지만 아래의 토우 사진은 그 억측도 무산시켜버린다. 공룡의 등에 사람이 타고 있는 토우도 있는데, 이것은 공룡과 인간이 함께 살았다는 가설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한다.지금 이 토우들은 아칸바로 박물관에 일부 전시되어 있으나,태반이 골판지 상자에 넣어져 아칸바로 시청 창고에 잠들어 있다. 바그다드의 고대 전지(기원전 1세기) 1937년,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의 남서쪽 교외 언덕에서 약 2000년전의 고대 바르티아 유적으로부터 점토로 만든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당시 발굴책임자 독일사람 빌헤름.케니히 박사는 함께 발굴된 동으로된 원통과 철봉등을 관찰한 결과, 이것은 전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복제품을 만들어 테스트를 한 결과 1.5볼트의 전기가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의 문명사에는 전지는 18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알렉산더.볼트가 발명했다고 되어있다. 하트홀 신전의 조명기구(기원전 1세기)TOP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는 피라밋 최대의 수수께끼 - 그것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이 없다는 것이다. 피라밋이나 신전 내부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명이 필요하다. 횃불을 사용했다면 천정이나 벽면에 그을음이 남아있을텐데 전혀 그을음이 없다. 학자들에 의해 [무연 촛불] [조립식 거울]과 같은 고육지책의 가설이 나왔지만 실증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1964년, 스웨덴의 고대사연구가 이완 트로에니가 하트홀 신전의 지하실 벽화에서 강력한[조명 기구]를 발견해냈다.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이 하트홀 신전의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는 지하1층 G실27, 29 벽면에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벽화가 있다. 신관(神官, 전기기사?)을 앞에 두고 2명의 조수가 무엇을 바치고 있는 그림이다. 고대 이집트에는 전구가 있을 수 없다는 선입견을 제거한다면 분명히 전구처럼 보이는 물건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전구를 사용했다면 피라밋의 수수께끼는 쉽게 풀린다. 마야의 우주복을 입은 신TOP 벽의 조각물등에 자주 등장하는 (우주복을 입은것과 같은) 마야의 신들은 항상 큰 헬멧을 쓰고 입과 코 주위에는 산소호흡기 (혹은 소형마이크)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잉카의 신들은 키가 30 ~ 60cm 밖에 안되는 소인들이었고 '벼락막대기'를 손에 지니며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과 동물들의 피를 좋아했고, (자신들을 위하여)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과 동물의 피, 심장등을 제물로 바치게 강요를 하였다고 합니다. 콜롬비아의 황금셔틀(기원전500-800년경)TOP 남미 콜롬비아에 기원전500-800년경의 시누문명의 유적으로부터, 길이 약 6㎝, 폭 약 5㎝, 높이 약 1.5㎝의 새와 같은 모양을 한 황금 셔틀이 여러개 발견되었다. 잘 조사해보니, 삼각 주날개와 수평 꼬리날개, 수직 꼬리날개가 있고, 풍향계, 조종석, 엔진의 공기흡입구가 있었다. 뉴욕 항공연구소 어서.포이슬리 박사를 비롯한 연구원 일동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이 모형은 항공역학의 이론대로 만들어진, 델타 날개의 젯트전투기이거나, 로켓식 스페이스.셔틀(우주선)의 모형이다] 인류가 동력식 비행기를 발명해 하늘을 난 것은 1903년(지금부터 96년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최초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옛날에도 인류는 비행기로 창공을 날았다는 이야긴가? 이 황금 셔틀은 지금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황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키나와 열도 요나구니지마의 해저유적TOP 일본 오키나와열도의 남단,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바다 및에 고대 유적이 발견되어, 지질학계 학자들 사이에 그것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다, 아니다,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98년 12월 29일, 아카보시요타로씨가 수심 25미터 지점에서 인공으로 만들어진 석판을 발견했다. 4, 5톤이나 되어보이는 바위 아래, 모래에 파묻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석판의 표면에는 굴등과 조개류, 그리고 석회질등이 잔뜩 부착되어 있어,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석판에는 직경 2, 3 센티 정도의 구멍이 두 개 있는데, 그 부분의 표면은 매끈매끈했다. 안티키테라의 기계(그리스. 기원전1세기)TOP 1900년, 그리스의 크레타섬 북부의 작은 섬 안티키테라 앞바다에서, 한척의 침몰선을 건져올렸는데, 그 가운데에 있던 기계이다. 그 배는 기원전 65년경, 그리이스에서 로마로 가다가 조난당한 상선으로 보이는데 그 안의 대부분은 청동과 대리석의 조각이었다. 이 청동 조각에는 기원전 82년 제작되었다고 적혀져 있었는데, 1958년 이 기계를 처음 대면하게된 캠브리지 대학의 프라이스 교수의 오랜 연구에 의해 1971년, 이 기계가 자동회전식 천구의(天球儀)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 기계는 태양계의 모든 혹성들의 상대위치와 시간을 아주 정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톱니바퀴를 이용한 자동기어 메카니즘이 과학사(科學史)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575년이다.<세계유물 정보 끝 피라미드 정보시작> 세계의 중심에 위치-세계 대륙을 4등분 피라미드의 대명사는 이집트 쿠프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피라미드(기원전 2천5백년 추정). 과학자들이 가장 많은 연구를 수행한 피라미드다. 대피라미드 옆에는 쿠프왕의 아들과 손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두 개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있고, 왕비의 무덤이라는 작은 피라미드 6개가 3개씩 2줄로 배치됐다.
이 9개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한 기자 지역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여러 면에서 지리학적인 ‘중심’이라는 점이다. 먼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수직선(동경 31도)과 수평선(북위 30도)을 그리면 전세계 대륙 면적이 거의 4등분된다.
또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끝부분을 원호로 연결할 때 대피라미드는 원의 중심에 위치한다(그림 2). 이곳은 고대의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피라미드가 세계의 어떤 ‘중심’이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현대 기술이 손 든 정밀성-밑변을 높이로 나눈 값은 π/2 대피라미드를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먼저 대피라미드의 엄청난 규모에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구조물의 건축학적 정밀성을 확인하고 감탄하기에 이른다.
대피라미드의 네변 길이는 모두 2백30m 정도. 평균 2.5t의 무게와 어른 키만한 돌로 이렇게 길게 받침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각 변의 길이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소숫점 첫째 자리에서 값의 차이가 날 뿐 거의 비슷하다. 또 각 밑변이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고 밑변의 각 모서리가 90도를 이루는데, 무시할 정도로 오차가 작다.
현대의 건축학자들은 이런 정밀도를 가진 거대한 건물을 짓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더욱이 밑변 하나의 길이를 높이(1백46.6m)로 나눈 값은 1.57. 원주율(3.1416)의 절반에 해당하는 이 수치까지 고려된다면 피라미드의 건축 과정은 더욱 복잡했을 것이다.
지구 크기를 상징한다-43200의 비밀 과학자들은 대피라미드에서 측정된 각종 수치들을 여러모로 연관시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대피라미드에 숨겨진 천문학적 수치가 드러났다.
먼저 과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독특한 단위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재 보편적으로 알려진 1피라미드 단위는 지구의 남북극 거리를 2천만으로 나눈 수다. 이 단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밑변 하나를 이 단위로 나눈 값은 약 365. 잘 알고 있듯이 이는 1년의 날짜다.
지구의 세차 운동과 연관된 수치도 발견됐다. 지구의 적도 둘레는 약 4만75km, 반지름은 약 6천3백78km. 그런데 이를 ‘4만3천2백’으로 나눠 보니 이상한 값이 나왔다. 먼저 적도둘레를 나누면 약 9백27m가 산출된다. 피라미드 네변의 합과 거의 유사한 값이다. 또 지구 반지름을 나눈 값은 약 1백47m. 피라미드 높이에 거의 일치한다. 피라미드의 둘레와 높이가 지구의 크기를 상징하는 셈이다. 문제는 ‘4만3천2백’이란 값이 어떻게 산출된 것이냐는 점이다.
이 값은 세차 운동에서 발견되는 특정 값인 ‘4천3백20’을 10배한 수치다. 세차 운동은 지구 축이 약 2만6천년을 주기로 3백60도 회전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한 학자가 지구가 60도를 이동하려면 약 4천3백20년이 걸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마침 4만3천2백을 비롯해 4천3백20, 4백32와 같은 수는 고대 신화에 자주 등장해 학자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4만3천2백’이란 수치를 피라미드 둘레와 높이가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데 사용했다.
왕의 방에 담긴 수수께끼-북극성 관측 위해 오차까지 고려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장소는 일명 ‘왕의 방’이다. 밑면에서 3분의 1 떨어진 곳에 위치해 면도날을 재생시키고 부패를 막는 등 ‘피라미드 파워’를 일으킨다는 곳이다. 이곳에는 어떤 수치들이 숨겨져 있을까.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왕의 방’의 가로와 세로를 비롯한 여러 가지 건축 구성 비율이1:1.618, 즉 황금비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흔히 황금비는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알려졌는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건축된 피라미드에서 나타난 것이다.
황금비는 사람의 눈에 가장 조화스럽게 인식된다고 알려져 건축, 조각, 회화 등 예술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직사각형은 두변이 황금의 비로 분할돼 있을 때 가장 정돈된 느낌을 준다. 주변에서 흔히 사용되는 명함이나 담배갑, 엽서가 이 비율를 따라 만들어다.
기하학적으로 맞아 떨어지는 값들도 발견된다. 피라미드를 왕의 방 밑바닥 방향에서 수평으로 자르면 수평면 면적이 피라미드 밑변 면적의 절반과 일치한다. 방 밑바닥의 대각선 길이는 피라미드 밑변 하나의 길이와 같다. 게다가 옆변 길이는 밑면 대각선 길이의 절반이다. 한편 왕의 방 북쪽 벽에는 비스듬히 하늘을 향해 뚫려 있는 가느다란 통로가 있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북극성을 관찰하기 위해 만든 통로라고 주장했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당시의 별자리를 고려한다면 이곳에서 북극성을 보기 위해 피라미드는 정확히 북위 30도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피라미드의 위치는 북위 29도58분51초. 이 오차는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가. 한편으로 북극성에서 발하는 빛이 공간에서 굴절되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약간 뒤에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관찰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근소한 오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원설-오리온자리와 일치 대피라미드가 설립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쿠푸왕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기원전 2천5백년 경에 설립됐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기원전 5세기)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한 승려로부터 듣고 기록한 내용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해 헤로도투스가 잘못 알았다면 우리의 상식도 잘못된 것이다.
새로운 해석이 천문학 분야에서 제기됐다. 단서는 쿠푸왕과 아들, 손자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세 피라미드의 위치가 오리온 별자리 가운데 세 별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제시됐다(그림 3). 현재 이 세 별은 기자의 남쪽 하늘에 있는데, 아래쪽 두 별(알 니탁, 알 닐람)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세 번째 별(민타카)은 그 선에서 약간 왼쪽, 즉 동쪽 방향으로 어긋나 있다.세 피라미드와 유사한 배치였다.
이 점에 착안한 어떤 천문학자는 피라미드를 만든 시기가 혹시 이 별들이 피라미드의 바로 위에 떠있던 때가 아닐까 추측했다. 이를 가정해 계산한 결과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약 1만4백50년이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 시기에 하늘의 은하수는 나일강의 위치에 거의 중첩돼 펼쳐져 있었다.
대피라미드 옆에 선 거대한 돌덩이 스핑크스도 이런 추측을 강화시켰다. 사자 모양을 한 스핑크스가 바라보는 쪽은 정동 방향. 태양은 낮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에 정동에서 뜬다. 고대인들은 보통 춘분점을 천체 시스템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이때를 태양의 1년 주기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파악하고 다른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왜 사자모양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춘분에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별자리의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스핑크스가 만들어진 당시 정동 방향에 사자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기원전 1만9백70년에서 기원전 8천8백10년 사이. 피라미드가 1만4백50년 경 만들어졌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수치다.
공간의 미학, 황금비-자기 유사성 가진 조화 ‘왕의 방’에서 발견된 황금비는 12세기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가 발견한 수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피보나치 수열은 연속적으로 배열된 수에서 앞의 두 숫자를 더해 다음 수가 배열되는 방식에 따른다. 즉 1, 1, 2(1+1), 3(1+2), 5(2+3), 8(3+5)…의 형태다. 이때 뒤로 갈수록 ‘앞의 수:뒤의 수’가 황금비와 유사하게 일치해간다.
황금비의 성격을 기하학적으로 풀면 다음과 같다. 왼쪽과 같이 먼저 하나의 직사각형을 그린다(변의 길이 a, b). 다음 긴변(b)으로 이뤄진 정사각형을 그려 붙인다. 여기다 a+b, (a+b)+b, (a+b+b)+b…인 정사각형을 계속 붙여 나간다. 이때 모든 직사각형에서 두변의 비율이 항상 최초의 직사각형 변의 비율(a:b)과 같을 수 있는데, 그 비율이 바로 황금비다. 이처럼 황금비는 자기 유사성을 가진다.
황금비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예를 보자. 정5각형의 대각선을 두 개 그릴 때 각 대각선은 황금비로 나뉜다. < 출처에 있는 사이트에 가시면 더 많은 정보를 보실수 있습니다> 출처http://www.oldhome.pe.kr/ 2007.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