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숭배 금지령과 프랑크 왕국의 피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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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댓글 4건 조회 1,449회본문
프랑크 왕국은 교황과 정치가 별개였잖아요. 반대로 비잔티움은 황제교황주의였구요. 그런데 비잔티움제국의 황제가 프랑크의 황제에게 성상숭배금지령을 내리고 그 계기로 로마교황이 비잔티움과 갈라서서 로마교황은 정치적 힘이 필요해서 피핀의 롬바르드족 정벌 영토를 받아들이잖아요? (사실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여기서 말하는 로마교황은 프랑크의 교황인건데 그럼 프랑크왕국의 교황이지 왜 로마의 교황인거죠? 그 땅이 원래 로마의 땅이어서 그런건가요? 제가 이해가 잘 안되서 글을 잘 못썼는데 양해부탁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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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익명 작성일
로마의 교황은 바티칸이라는 로마 내의 영지에 상주했는데요
바티칸은 지리적으로는 로마의 영토였지만 어느 나라의 간섭이나 통치를
받지않는 하나의 국가같은 개념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의
교황청같이 공식적으로 어느 나라의 비호를 받는 케이스랑은 다릅니다.
따라서 로마교황청이 프랑크의 편을 들었다고 해서 프랑크교황청 이라고 보는것은
옳지 않습니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로 감사할 때 참고해주세요.
2020.03.26.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익명 작성일
일단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이, 비잔틴이니 비잔티움이니 하는 이름은 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학자들이 편의상 붙인 것이지 당시에는 비잔틴 스스로는 물론 다른 나라들도 '로마 제국' 으로 불렀습니다. 로마 제국의 후계자조차도 아니고, 그냥 그 자체라는 뜻이죠.
그리고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로마의 황제가 교황과 기독교회를 지킬 책무가 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고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로는 비잔틴 황제(당시 명칭으로는 그냥 로마 황제)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비잔틴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리는 등 종교적으로 영향을 미칠 힘은 있었으나 정작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를 차례로 침공해오는 여러 게르만계 부족들(대표적으로 롬바르드 족)이나 북아프리카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이슬람 해적들(아라비아 제국이 북아프리카는 물론 이베리아 반도까지 정복한 내용은 교과서에 나올 텐데, 이 가운데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이후 해적이 되어 기독교 국가들을 괴롭혔습니다)에 맞서 교황을 지켜 줄 힘까지는 없었고, 이에 교황은 멀리 있는 비잔틴 황제보다 가까운 프랑크 왕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 준 것도, '로마 황제는 교황과 기독교회를 수호한다' 라는 원칙(?)상 비잔틴 황제 외에 교황을 지켜 줄 사람은 서로마 황제여야 했기 때문이었죠.
덧붙여 로마 교황은 교황인 동시에 로마 시의 주교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초기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등 다섯 개의 대도시를 맡은 주교를 대주교로 높여 불렀는데, 이 가운데 뒤의 셋이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만 남은 상황에서 로마 대주교가 자신을 더욱 높여서 교황이라고 부른 것이죠(이게 후에 동서 교회가 갈라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입장에서는 '네가 나보다 높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교황이 로마 주교 자리를 잃지 않는 한 '로마 교황' 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적어도 지금까지 이 자리를 잃은 적은 없습니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로 감사할 때 참고해주세요.
2020.03.26.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익명 작성일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 교황이나 피핀이 어느 한 쪽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 양자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이해하셔야 합니다. 쉽게 동맹관계일 뿐 교황이 피핀에게 명령하거나 피핀이 교황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피핀은 일단 프랑크의 왕이 아니라는 걸 아실 필요가 있는 겁니다.
영어로는 피핀이지만 프랑스어로는 페펭이며 실은 페펭가문의 가문명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존 F 케네디를 그냥 케네디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말하는 피핀(페펭)은 프랑크의 궁재일 뿐 왕은 아니라는 거죠. 뭐 페펭가문이 궁재라는 관직을 독점하면서 피핀대에 오면 실상 프랑크의 전권을 쥐고는 있지만 여전히 왕은 따로 있었고, 그 가문이 바로 메로벵지엥 왕조입니다.
왕위는 찬탈을 하고 싶고 그럴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명분없이 그짓을 했다가는 다른 귀족 제후들의 공격받을 상황이라 피핀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니, 이미 사라진 서로마제국 황제위를 자처하는 거였습니다.
황제는 왕보다 높으니까 굳이 찬탈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거죠. 헌데 서로마제국 황제위는 원래 로마 원로원이 추대하고 로마군단의 추인을 얻어 교황이 관을 바치는 등극식을 통해 황제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서로마제국이 멸망했으니 앞의 두 단계는 무시될 수 있고 형식적으로 교황에게 황제위를 받는 식이라면 명분이 선다고 생각한 겁니다. 물론 교황이 맨입에 그걸 해줄 리는 없으니 적당한 선물로 고른 게 로마시 인근을 장악하고 있는 롬바르드족의 영토를 빼앗아 그걸 교황령을 주는 방식을 채택한 겁니다.
교황 입장에서도 어차피 서로마는 멸망했으니 서로마 황제위를 책봉하던 말던 딴지 걸 사람도 없고, 고작 책봉식 한 번 해주고 교황령이 떨어지는데 손해볼 게 없기에 응한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피핀은 무력과 권력은 있는데 명분이 없었고, 교황은 명분은 줄 수 있는데 세속 권력이 없기 때문에 양자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는 전략적 제휴를 한 셈이죠.
교황이 서로마 황제위를 넘겨주며 덤으로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얹어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황제관을 줄테니까 앞으로 날 계속 지켜줘~ 라는 뜻)
그전까지는 교황은 5대 주요 주교중에 명분상 선두를 지키고 있었는데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헌데 동로마 황제는 동시에 콘스탄티노플 주교이기도 하기 때문에 교황의 말 따위는 씹는 건 물론 사사건건 간섭하려고 했기에 교황으로는 동로마 황제와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동로마에게 개길 세속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피핀으로서는 교황에게 찬탈의 정당성과 권력의 신성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교황권이 필요했고, 교황으로서는 동로마황제의 지긋지긋한 간섭을 끊고 독자 세력화하기 위해서 피핀가문의 보호가 필요했기에 이뤄진 동맹이었던 겁니다.
참고로 교황을 비롯한 서방교회가 십자가와 같은 우상 숭배를 허용한 배경에는 동로마같이 문명화된 세력이 바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만족이 휩쓴 서유럽에는 여전히 반달족과 같은 게르만 족이 주류였는데 이들에게 하느님은 보이지 않아도 믿어야 한다는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뭔가 손에 잡히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말로 게르만족은 당시만 해도 딱히 문자도 없었습니다.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문맹들이 드글드글한데 성경책 읽어준다고 해도 무식한 야만족들이 알아들을리가 없었던 이유.
절대 프랑크의 교황이 아니라는 증명은 피핀의 프랑크 가롤랭지앵 왕조는 고작 몇 십년만에 나가리되었지만 여전히 교황은 교황이라는 게 그 증거입니다.
참고로 피핀가문이 보유했던 서로마황제위는 프랑크가 사분오열되면서 역시 공중에 떴다가 동프랑크를 장악한 일련의 세력들이 칭하기 시작했고(이때 동프랑크는 로마지역을 획득하지 못해 교황의 서임을 받지 못해서 그냥 제국이라고 불렀다) 이후 로마를 획득한 이후 이름을 바꾸니 그게 바로 신성로마제국입니다.
참고로 신성 로마제국의 신성은 새로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신성하다는 뜻이고, 실은 원래 로마황제위에 붙어있던 수사였습니다. 즉, 원래 로마제국의 정식명칭이 신성로마제국인데 후대와 구별하기 위해서 전기를 그냥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거일 뿐이죠. 참고로 동로마제국의 정식명칭도 동로마제국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입니다. 역사가들이 구분하기 위해서 동로마라고 하는 거일뿐.
비유를 하자면 우리는 한국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나라들은 북한과 구별하기 위해서 남한(사우스 코리아)라고 부르는 이치와 같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우리는 스스로를 한국이라고 하지 그다지 남한이라고 부르지 않는 걸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로 감사할 때 참고해주세요.
2020.03.26.
최고관리자님의 댓글
익명 작성일
성상 파괴 운동이란 8~9세기 크리스트교에서 성화상(이콘) 공경이 금지되고 성상을 파괴한 운동이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양분시켜 내전을 초래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이 이를 비난함으로써 성상 파괴 논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과 함께 결국 동서 로마 교회의 분열, 즉 크리스트교가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으로 서로 갈라서는 최초의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 문제풀이 지식iN 교육기부 참여로 작성된 답변입니다. 알아두세요!
위 답변은 답변작성자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입니다. 포인트로 감사할 때 참고해주세요.
2020.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