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대한민국 정치사 소개 1편 - 제 1,2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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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EN2l733 댓글 0건 조회 245회본문
먼저 최대한 중립적으로,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쓰기위해 노력했음을 밝힙니다. 정치적 분석이 아니라 계파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칼럼입니다.
이 칼럼 시리즈를 시작할 때 어느 때를 칼럼의 첫번째로 잡느냐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임시정부 시절의 정치? 해방정국 미군정시기의 정치? 등등 많은 부분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했을때, 또한 대체로 현재 우리가 접하는 당의 효시인 민주당부터 시작하는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국전쟁중 발췌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하여 연임에 성공한 이승만은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당시 2회까지만 연임이 가능했던 대통령직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제한을 철폐하려 하였습니다.
이 개헌안을 반대했던 세력들의 모임이 모여 1955년 창당한 당이 민주당이고 최초의 거대 야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보스 장면과 윤보선)
개헌을 막기위해 만들어진 정당이므로 출신 성분도 다양했고, 이승만 정부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냈으나 권력에서 밀려난 장택상 같은 인물도 끼여있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조봉암도 이 정당에 참여하려 했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던 장택상은 이를 지지했으나 반공주의 성향이 강했던 당시에 공산당 전력이 있던 조봉암은 배척 받았고, 결국 입당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조봉암은 따로 진보당을 차리게 됩니다.)
민주당내에서 계파는 크게 구파(윤보선, 유진산, 신익희, 김영삼)와 신파(이철승, 정일형, 장면, 김대중)으로 이 두 계파가 당권을 두고 경쟁하게 됩니다. ※이 구파와 신파를 YS계와 DJ계의 갈등의 시초로 봐도 무방
사사오입 개헌은 지금에서 보면 순 억지 논리로 결국 통과가 되었고, 결국 이승만은 연임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3대 대선 포스터, '못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문구가 인상적, 이에 자유당은 '갈아봤자 더 못산다!' 로 대응)
다음 대선인 제 3대 대선에서 민주당과 이승만의 자유당은 정면으로 맞붙게 됩니다.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에 구파인 신익희를, 부통령 후보에 신파인 장면을 공천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신익희는 전남지역 유세를 위해 기차로 이동하던 중 급사하게 됩니다. 이 혼란속에서 민주당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과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지지자들에게 무효표 처리가 되더라도 신익희를 뽑는 추모표를 던지라고 지시합니다. 실제로 전체 투표수중 20프로는 무효표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제3대 대통령 선거는 무소속 조봉암이 30%, 자유당 이승만이 70%로 이승만이 승리하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46%, 이기붕이 44% 득표하여 장면이 부통령이 됩니다. 이 과정속에서 자유당의 부정선거 문제가 있었고, 조봉암은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 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합니다.
(죽산 조봉암의 사형집행전 모습. 죽기전 막걸리 한사발과 담배 한개피만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이 대선 결과로 자유당은 조봉암을 가만두었다가는 자신들의 권력을 뺏길것을 염려해 1958년 '진보당 사건' 을 일으킵니다.
진보당을 창당하여 북한과 내통하고 간첩행위를 하여 대한민국을 파괴하려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조봉암은 판결결과 사형당하게 됩니다.
한국전쟁 이후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진보계열을 없애기 위해 자유당은 사법살인을 저질렀고,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진보계열은 긴 동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 이부분은 최근 소련 기밀문서에서 북한과 접촉하였다는 부분이 발견되었으나, 대법원 2011.1.20. 선고 2008재도11 전원합의체 판결간첩·간첩방조·국가보안법위반·법령제5호위반 공2001상, 508 의 판결에 기반하여 사법살인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제 1공화국 몰락의 원인 제공자 중 1인, 이기붕)
다음 선거인 제 4대 대선을 위해 자유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유지하려 했고, 대규모 부정선거를 기획하게 됩니다.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구파의 조병옥, 부통령 후보로는 재선을 노리는 장면을 다시 내세우나, 저번 대선과 마찬가지로 조병옥은 선거기간 도중 급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부정선거 계획은 부통령 선거에 쓰이게 됩니다. 당시에 이승만의 나이가 85세의 고령으로, 사망시 대통령 직을 승계할 사람인 부통령 선거의 중요성이 더더욱 올라간 측면도 있었습니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부정선거로 기록된 3.15 부정선거의 결과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부통령으로 이기붕이 당선되었으나, 이는 국민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고, 4.19 혁명으로 이어져 제 1공화국의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승만의 하야 후,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1960년, 제 2공화국이 들어서게 됩니다.
개정 헌법의 주요 특징으로는 의원내각제, 양원제가 있습니다. 이 구도에서 실시된 대선 또한 국회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민주당의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됩니다. 구파인 윤보선이 대통령을 가져가는 대가로, 신파인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어 정권의 실권을 가져가게 됩니다.
(YS계와 DJ계의 갈등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속에서 구파와 신파 간의 갈등은 격화되었고, 신파가 정권을 이끄는 데에 대한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구파는 탈당하여 신민당(1960년)을 창당하고, 장면 내각과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속에서 수많은 데모,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정치권 등으로 인해 사회는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이를 잠자코 지켜보며 힘을 키우던 한 군인이 있었습니다....
다음편 예고:
PS. 1. 이승만과 박정희의 관계는 실제로 굉장히 나빴다고 전해진다. 박정희는 끝내 이승만의 귀국요청을 거부하였고, 이승만이 독립운동에서 한게 뭐가 있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을 깎아내리기 위해 김구를 대대적으로 재조명하게 된 것도 박정희의 입김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김구의 차남 김신이 5.16 군사정변에 참여한 영향도 존재한다고 보여짐)
2. 당시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여론은 나쁘진 않았음. 독립운동가 출신에 반공주의를 기조로 내세워서 대중의 신임을 받았음 그러나 말년으로 갈수록 이승만의 기력은 점점 떨어졌고, 임기 말에는 육사에 방문하였을 때 육사가 뭐하는 곳이냐고 물어봤다는 일화도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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